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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

동거 가족과 비법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유산 소유권 문제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는 흐름 속에 있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사실혼이나 동거로 함께 살아가는 커플, 결혼 대신 장기적으로 함께 거주하는 파트너 관계, 법적 보호자가 아니지만 실질적 가족 역할을 하는 경우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사망했을 때, 이런 비법적 관계에 있는 사람이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디지털 유산은 점점 더 중요한 개인 자산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법적 소유권과 접근 권한은 여전히 전통적인 ‘법적 가족 관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동거인, 사실혼 배우자, 생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법과 정서의 괴리, 새로운 갈등, 상속권의 사각지대가 드러나고 있다.

동거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유산 소유권

디지털 유산 소유권의 기준은 여전히 법적 가족

디지털 유산의 소유권은 대부분 계약자, 즉 본인 사망 시에는 ‘법정 상속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이는 한국 민법상 상속 질서에 따르며, 배우자, 직계비속, 직계존속 등의 순서로 유산에 대한 권리가 주어진다. 문제는 법적으로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사실혼 관계, 장기간 함께 살아온 동거인 등은 상속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망자의 실제 생활 파트너였더라도, 법적으로는 단순한 ‘타인’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사망자의 구글 계정에서 클라우드 사진을 내려받아 추모 영상을 만들고 싶어도, 넷플릭스, 유튜브, 티스토리, 블로그, 메일 계정, 심지어 디지털 지갑 접근조차도 법적 가족이 아닌 이상, 공식 요청 권한이 없기 때문에 플랫폼 측에서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망자가 생전에 아무런 위임이나 정리 없이 세상을 떠났을 경우 실제 관계가 깊었던 동거인은 그 사람의 디지털 흔적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이별을 맞게 되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게 된다.

 

디지털 유산과 사실혼 동거인 간 갈등 사례

현실에서는 이러한 디지털 유산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한 사례로 10년 이상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던 커플 중 한 명이 사망했고, 사망자의 블로그에는 수익이 발생하는 애드센스 계정이 연결되어 있었다. 생전에 함께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하던 동거인은 당연히 블로그 계정을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사망 후 애드센스 수익 수령 및 계정 접속 권한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는 장기간 동거했던 커플이 구글 포토에 남긴 추억의 사진을 정리하려 했지만 로그인 정보는 사망자만 알고 있었고 구글 측은 법적 상속인의 요청만 수용한다는 정책을 따랐다. 결국 동거인은 사진 한 장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모든 기록에서 배제되었다. 이처럼 디지털 유산은 소유권과 정서적 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 갈등이 발생한다.
고인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정작 디지털 자산에 접근하지 못하고 법적으로만 관계가 있는 사람이 모든 권한을 갖게 되면 고인을 둘러싼 기억과 권리가 분리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디지털 유산에 대한 생전 지정과 위임의 필요성

현재로서는 사망자가 생전에 디지털 유산의 권리자를 직접 지정해두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특히 법적으로 배우자가 아니거나 법적 상속권이 없는 동거 가족, 연인, 친구가 있을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생전 위임과 정리를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 Inactive Account Manager (구글) 설정 → 데이터 공유 대상을 1~10명 지정 가능
  • 애플 디지털 유산 연락처 등록 → 아이클라우드 사진, 메모, 연락처 등 공유
  • 디지털 유언장 작성 → 계정 목록, 유산 처리 방향, 수익 분배 방식 등 포함
  • 이메일, 블로그, 애드센스 등 주요 플랫폼에 대한 위임 문서 작성

특히 수익이 발생하는 유튜브 채널, 블로그, NFT, 암호화폐 지갑 등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법적으로 상속 대상이 되기 때문에, 유언이나 위임이 없는 상태로 사망할 경우 반드시 법정상속인에게만 권한이 귀속된다. 결국 고인이 디지털 유산에 대해 아무런 지정이나 설명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실제 고인과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그 유산을 해석하거나 보존할 권한조차 가질 수 없게 되는 현실적 불균형이 발생한다.

 

디지털 유산 소유권 문제에 대한 제도적 과제

법적 공백을 줄이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도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통합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법상 상속 재산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디지털 자산이 사적 기록인지 경제적 자산인지에 따라 판단 기준이 일관되지 않고 모호하다. 또한 동거 가족이나 사실혼 배우자 등 ‘비법적 관계인’이 디지털 유산의 처리 주체가 될 수 있는 법적 지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독립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계정 접근, 데이터 처리, 삭제 권한 등 명시), 사실혼·동거 관계에 대한 디지털 자산 위임 기준 마련해야한다. 또한 유언 없이 사망한 경우 실질적 생계공동체에 우선 접근 권한을 주고, 디지털 자산의 경제적 가치와 감정적 가치를 분리한 법적 분류 체계를 개발하는 등 제도적 논의가 필요하다.

법률이 감정보다 앞설 수는 없지만 디지털 유산은 감정과 소유가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실보다 뒤처진 제도로는 대응이 어려운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유산 앞에서 소외되는 사람을 남기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사람과 가장 가까웠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기억조차 지울 수 없는 상황은 두 번의 이별을 겪는 것과 같다. 디지털 유산은 더 이상 사적인 파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흔적이며 추억의 통로이고 때로는 경제적 자산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소유권과 접근권이 단순히 혈연과 혼인관계로만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는 점점 다양해지는 인간관계를 따라가야 하며 고인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작동해야 한다.